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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00주년 기념 '여수시민문화제' 감동

글쓴이 : 날짜 : 2019-03-02 (토) 03:20 조회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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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문화 총망라 100명 추진위원··· "그날의 외침으로 대한독립 만세!" [진규하 기자(=여수)]
 
100년전 그날의 만세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퍼진 가운데 여수지역에서 시민들의 자발적 모임인 '여수 3·1혁명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개최한 "여수시민문화제"가 감동을 주고 있다. 
 
▲여수시 이순신광장에서 100인 시민문화제 추진위원회가 주최한 3.1절 기년행사 ⓒ진규하 기자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총 망라해 각계각층에서 참여한 추진위원에는 주승용국회부의장과 이용주 국회의원, 이찬기 여수시의회 부의장, 이광일 전남도의회 예결산위원장을 비롯해 전남도의회 의원과 여수시의회 의원, 석천사 주지 진옥스님 등 100여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자리에는 또, 권오봉 여수시장을 비롯해 서완석 여수시의회 의장, 50여개의 시민단체와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우국충절의 얼이 담긴 충무공 이순신동상이 세워진 이순신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자리에서 권오봉 여수시장은 "시민의 힘으로 지켜온 지난 100년의 역사를 바탕으로 미래 100년은 ‘시민이 주인’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비전과 가치를 담은 것으로, 100년 전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낭독했듯이, 시민사회단체가 주체가 되어  100주년의 의미를 더하는 것 같다"며 짧은 시간 동안에 관이 아닌 시민단체가 큰 행사를 준비한것을 보니 이것이 정말 여수시민의 저력이다"라고 치하한뒤 만세삼창을 제안해 100년전 그날을 재현했다.

또, 이날 집행위원으로 참여한 한정우 위원은 "항일 독립운동사에 대한 재조명과 친일 잔재 적폐청산등 정신계승 운동을 펼쳐나가고 '그날의 외침으로 대한독립 만세!' 그 뜻을 이어가기위해 3·1절 100주년기념 여수시민문화제를 제안 추진하게 되었다"며 추진배경을 설명했다.

이현종 집행위원은 기념사에서 "강대국의 압박과 견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독립국가임을 만방에 외친 3·1혁명의 정신을 가슴에 새겨 민주공화국의 주인임과 여수자치의 주인임을 선언하기 위해 이자리를 만들었다"고 전제한뒤 "진정으로 자주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자유와 평등과 평화가 넘치는 한반도와 시민이 행복한 여수를 만들기 위해서 더 많은 시민들이 앞으로 함께 해 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이날 2부 문화공연 에서는 수원사나래 전미숙씨의 진도 북놀이와 한나래무용팀의 독립제열사 추모 한국무용공연, 둔덕 아동센터(센터장 하혜순) 어린이들의 독립선언서 입체낭독, 무림체육관 소속 관원들의 특공 무술시범드이 펼쳐 졌으며 이 지역 성악가인 바리톤 이중현씨와 가수 서혁신씨의 공연과 함께 여수지역에서 시민운동 밴드로 알려진 '상록수 밴드'의 공연이 이어졌다.

이날 행사는 집행위원인 김영 단장이 이끄는 여수 우도풍물굿 보존회의 일제 강점기를 버텨온 어머니들의 한의 소리인 ‘아리랑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시민 박모씨(59세,여서동)는 "국권회복을 위해 민족자존의 가치를 드높였던 ‘선열들의 위업’을 되새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친 ‘애국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엄숙하고 성대히 진행된 행사에 감동받았다"고 전했다.


진규하 기자(=여수) (jgh42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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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부터 2009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도로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던 독립문(1976년).

■1979년 3월2일 결국 옮기게 된 독립문

역사적 상징성이 우선일까요, 시민들의 편의가 우선일까요. 1897년에 세워진 독립문은 40년 전까지 지금 자리에서 7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독립문은 왜 자리를 옮겨야만 했을까요?

40년 전 경향신문은 “독립문이 끝내 옮겨지게 되었다”면서 만 2년에 걸친 서울시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회 간의 ‘옮긴다’ ‘못 옮긴다’ 줄다리기 논쟁과 서울시의 뜻대로 독립문이 자리를 옮기게 된 상황을 보도했습니다.

1979년 3월2일자 경향신문 6면 기사

기사에 따르면 독립문 이전 문제는 서울시가 1976년 11월 중앙청에서 금화터널을 거쳐 양평동으로 이어지는 성산대로 건설을 계획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시는 이듬해 2월 성산대로 도로계획을 고시하면서, 당시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독립문을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합니다.

독립문 로터리 앞에 전신주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1970년).
그러나 서울시의 계획은 문화재가 도시계획에 밀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온 문화재위원회의 강한 반발에 부딪칩니다. 문화재위는 “독립문은 옛날 청국 사신을 맞아들이던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세웠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사대의 종식이라는 의미에서 그 위치가 중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갑자기 독립문이랑 ‘중국에 대한 사대의 종식’이 무슨 상관인가 싶으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1979년 이전을 앞둔 독립문. 경향신문 자료사진
독립문을 세우던 당시 독립해야할 대상은 일제가 아니라 청나라였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속국이었고, 독립문 자리에는 명나라 사신을 맞기 위해 지어 청나라 사신들이 올 때도 사용하던 영은문과 모화관이 있었습니다.

서재필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을 기념해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홀로 서자”는 뜻으로 독립문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직접 스케치하고, 건립기금을 모아 외국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에게 설계를 맡겼습니다. 이 시기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진 때이기도 했습니다. 독립문의 설립 배경이 오인받는 건 일제의 잔악함을 상징하는 서대문형무소와 위치가 가깝다는 탓도 있을 듯합니다.

오른쪽부터 읽어야 하는 ‘독립문’
문화재위는 “도시계획이 꼭 필요하다면 문화재보호법에 명시된 독립문보호구역 밖으로 도로를 내라”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문화재위는 대한문 위치 변경이나 남대문 옆 지하철 건설 문제 등으로 서울시와 계속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서울시는 독립문의 위치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금화터널과 사직터널을 연결하는 고가도로 설계를 변경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고가도로가 독립문보다 높게 양쪽으로 세워지기 시작하니 독립문을 그대로 둘 수가 없어져버립니다.

당시 서울시가 발표한 고가도로 설치 계획.
서울시는 다시 독립문 이전을 건의했고, 문화재위는 문화공보부에 처리를 위임합니다. 문공부는 사적32호인 독립문과 사적33호인 영은문 돌기둥 주초에 대한 지정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승인하고, 서울시는 독립문을 이전·복원하는 공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원래 독립문이 있던 곳은 도로로 만들고, 그 자리에 독립문이 있었다는 동판을 남기기로 하고요.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 남긴 동판.
당시 서울시가 독립문 이전을 추진할 때 밝힌 이유는 “독립문이 도로 한가운데에 위치해 시민과 친근감을 가질 수 없고, 독립문의 위치를 옮긴다고 조상의 얼이나 독립정신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장소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독립문은 공터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30년 동안이나 철제 울타리에 갇혀서 ‘홀로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건립 112년 만인 2009년 10월28일에야 서대문 독립공원 재조성 공사를 마치고 일반인에게 곁을 내어줍니다.

최근엔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옮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세간의 도마에 올랐습니다. 서울시가 새로 구상 중인 광화문 광장 계획에 두 동상을 옮기는 내용이 포함되었기 때문인데요. 부정적인 의견들이 나오자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들이 원하지 않으면 옮기지 않겠다”고 한 상황입니다.

5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이순신상이나 갓 10년이 된 세종대왕상이나, 동상 자체의 고증 부족에 대한 지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 됐건 광화문의 상징으로서 기능하고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론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지, 동상들은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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