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독립한 140여개 국가들 중 유일하게 과학진흥계획을 수립, 세계적인 과학국가 기반을 조성
-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유별났다.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한 데 이어 4개월 뒤인 그해 5월 제1차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또 박 정희 대통령의 과학기술 육성 정책은 1966년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1967년의 과학기술처 발족,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1971년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설립 등으로 이어졌다.
KIST의 파격적인 인사제도는 고급 두뇌를 영입해 한국 과학기술사에 분기점이 되는 굵직굵직한 연구성과를 내놓았다. 특히 한국의 근대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키워드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수립, 시행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경제개발 계획과 함께 시작된 국가적 차원의 과학기술 개발 로드맵인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경제개발 계획의 뿌리로서 기획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적 지식을 요하는 포병장교에 있었기 때문에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 시절에 과학의 중요성을 이미 파악했다. 그리고는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입국에 열을 올렸다.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해외에서 혁혁한 성과를 내던 유능한 과학 인재들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의 중요성을 일찍히 깨닫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없었다면 이후에 대덕연구소, 전자통신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등도 없었다.
당시 KIST 박사들의 대우는 박정희 대통령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았을 정도였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고 산업화가 필요하단 걸 절실히 느꼈었던 것이다. 그만큼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적인 대우와 격려에 과학을 발전시키고자 많은 박사들은 자신들을 희생했다. 3~4년 사이에 귀국한 18명 중 4명이 스트레스 때문에 암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시절 이미 과학과 기술이야말로 경제 발전의 근간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다. 총 4회에 걸쳐 1981년까지 진행된 기술진흥 계획 속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수많은 근간들이 탄생하고 꽃을 피웠다. 1945년 2차 대전 후에 독립한 140여개 국가들 중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수립, 시행한 것은 대한민국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확고한 리더십 원칙이 있었다. 첫째, 나라의 발전을 견인하기 위한 과학기술은 기능, 기술, 과학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고 둘째, 이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본과 시설이 마련되어야 함을 알았으며 셋째, 이들을 이끌고 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았다.
1961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79달러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과 경제 개발이 초석이 돼 대한민국은 과학경쟁력 세계 3위, 기술경쟁력 세계 14위, 과학 인프라 세계 3위(2009년 기준)로 성장했다.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의 공헌에 과학기술계 원로들은 박정희과학기술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기념관 건립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박원훈 KIST 연우회장(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총괄부원장)은 "기념관 건립은 단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한 국가지도자의 정확한 인식이 얼마나 국가발전에 기여했는지,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 세태에서 살아있는 교육 현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설립의도를 밝혔다.